동성애가 범죄였던 시절, 서로를 찾는 일 자체가 생존 행위였어요.
공원 벤치, 극장의 어두운 뒷좌석, 화장실 칸 — 지금은 그저 평범한 공간들이지만, 한때 이곳들은 게이 남성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연결되고, 살아남는 장소였어요. 이 관행에는 이름이 있어요. 크루징(cruising) 이라고 해요.
크루징은 단순히 성적 만남을 찾는 행위를 넘어서요. 그것은 억압 속에서 커뮤니티를 유지하는 방식이었고, 이성애 중심 사회에 퀴어의 존재를 새기는 저항이었으며, 서로를 알아보는 언어였어요. 200년이 넘는 문서화된 역사를 지닌 이 문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살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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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징이란 무엇인가요?
크루징이란 (주로) 게이·바이섹슈얼 남성이 공공장소나 반공공장소에서 만남 상대를 찾는 관행이에요. 장소는 공원, 극장, 화장실, 목욕탕, 해변의 특정 구역 등 다양했어요.
공식적으로 문서화된 역사는 1810년 영국 부터 시작돼요. 런던에서 '몰리 하우스(molly houses)'라고 불리는 비밀 모임 공간이 그 초기 형태였어요. 이탈리아에서는 같은 문화를 '바뚜아주(battuage)'라고 불렀는데, 2차 세계대전 무렵 이탈리아 게이 커뮤니티 내에서 생겨난 말이에요. 미국에서는 19세기 말–20세기 초 뉴욕, 샌프란시스코 같은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확산됐어요. 선원, 이주 노동자, 본가를 떠나온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에서 다양한 계층의 남성들이 공원과 목욕탕에서 만났어요.
이 모든 공간의 공통점이 있어요. 익명성이 보장되고, 주류 사회에서 벗어나 있으며, 신호를 교환할 수 있는 구조였다는 거예요.
범죄화의 시대 — 스톤월 이전
스톤월 이전 수십 년 동안, 크루징은 문자 그대로 생존 전략이었어요. 사적인 공간이 없거나, 있어도 파트너를 공개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공공장소는 유일한 만남의 장이었거든요.
뉴욕에서는 1923년 '섁노 법(Shackno Bill)'으로 남성 동성애 크루징이 처음으로 명시적으로 범죄화됐어요. 그 이후 1966년까지, 뉴욕시 단독으로 바, 거리, 공원, 지하철 화장실에서 50,000명 이상의 남성이 크루징 혐의로 체포됐어요. 한 도시에서, 40년 남짓한 기간에요.
경찰의 함정 수사(entrapment) 가 일상적이었어요. 사복 경찰이 게이 바에 접근해 대화를 나누다가, 함께 자리를 뜰 수 있다는 암시가 나오는 순간 체포하는 방식이었어요. 체포된 사람들은 직장을 잃고, 가족에게 알려지고, 사회적 지위를 박탈당했어요. 1950–60년대 '라벤더 스케어(Lavender Scare)' 시기에는 연방 정부가 동성애자 공무원을 색출해 해고하는 정책까지 시행했어요.
이런 환경이 역설적으로 더 정교한 소통 방식을 만들어냈어요. 손수건 색깔, 열쇠를 차는 위치, 신발 스타일, 시선을 처리하는 방식 — 복잡한 비언어 신호 체계가 발전했어요. 자기 신원을 노출하지 않으면서 의사를 전달하는 기술이었어요. 억압이 낳은 창조적 언어였죠.
크루징이 이루어진 공간들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했지만, 공통된 특성이 있었어요.
공원 — 가장 오래된 크루징 장소 중 하나예요. 도심 공원의 숲이 우거진 구역, 특히 야간에 조명이 어두운 곳이 이용됐어요. 어떤 경로로 걸으면 같은 목적을 가진 사람을 만날 수 있는지 구전으로 전해졌어요.
공중화장실 — 영국에서 '코티징(cottaging)', 미국에서 '티어룸(tearoom)'이라는 고유 명칭을 가질 만큼 광범위하게 이용됐어요. 기록은 1600년대 후반까지 거슬러 올라가요.
극장 — 심야 상영관의 어둠이 익명성을 제공했어요. 어두운 객석이 만남의 장소가 됐어요. 한국에서도 이 공간이 특히 중요한 역할을 했는데, 아래에서 다시 다룰게요.
목욕탕·사우나 — 스톤월 이후 1970년대에 게이 배스하우스(bathhouse)로 발전해 가장 합법화된 크루징 공간이 됐어요. 단순한 성적 공간을 넘어 커뮤니티 센터 역할을 했어요 — 영화 상영, 공연, 에이즈 검사, 심지어 선거인 등록까지 이루어졌어요.

스톤월 이후 — 해방과 황금기
1969년 스톤월 항쟁 이후 게이 해방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크루징 공간도 변화했어요. 게이 바, 클럽, 목욕탕이 급증했고, 1970년대는 게이 섹슈얼리티의 황금기로 불리는 시대예요.

범죄화의 두려움 없이 서로를 만날 수 있게 된 것, 그 자체가 당시 얼마나 큰 의미였는지를 지금의 시각에서 온전히 체감하기는 어렵지만 — 수십 년간 체포의 공포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혁명적인 변화였어요.
1966년에는 뉴욕 매티신 소사이어티(Mattachine Society)의 활동으로 뉴욕시 경찰의 게이 바 함정 수사가 크게 줄었어요. 1969년 스톤월 이후 경찰 단속이 더 줄었지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어요. 그러다 2003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로렌스 판결(Lawrence v. Texas)로 잔존하는 소도미 법을 위헌으로 결정하면서, 크루징을 단속하는 주요 법적 근거가 사라졌어요.
에이즈 위기 — 목욕탕 폐쇄 논쟁
1980년대 에이즈가 게이 커뮤니티를 강타하면서 크루징 공간이 다시 한번 공격받았어요. 이번에는 경찰이 아니라 공중 보건의 이름으로요.
1984년 10월, 샌프란시스코 보건국장 머빈 실버만은 시내 목욕탕 14곳의 폐쇄를 명령했어요. 그런데 단 6시간 만에 그 중 2곳이 다시 문을 열었어요. 이 사건은 게이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어요. 에이즈 예방을 위한 폐쇄를 지지하는 쪽과, 이를 "존엄성 박탈"이자 국가의 과도한 개입으로 보는 쪽이 충돌했어요.
에이즈 위기는 크루징 문화를 크게 위축시켰지만, 동시에 게이 커뮤니티 내 안전한 성관계(safe sex) 문화와 상호 돌봄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계기가 됐어요. 위기는 커뮤니티를 파괴하는 동시에 더 강한 연대를 만들어냈어요.
한국의 크루징 역사
서구만의 이야기가 아니에요. 한국에도 크루징 문화의 역사가 있어요.
1950년대, 전후 서울에서 가장 세련된 동네였던 명동의 양장점들이 게이들의 비공식 모임 장소가 됐어요. 근처 백화점 옥상 극장과 버스 터미널 화장실이 크루징 장소로 이용됐어요.
1970–80년대 — 종로3가로 중심이 이동했어요. 박정희 정권의 도시 개발로 낙원동 일대가 재편되면서 그 자리에 게이 술집들이 생겨났어요. 간판도 없이 "아는 사람만 찾아갈 수 있"는 공간들이었고, 손님들은 서로를 '가족'으로 여겼어요.
이 시대 종로3가의 중심에는 파고다 극장 이 있었어요. 일명 'P극장'으로 불리던 이곳 심야 상영관의 어두운 객석에서 크루징이 이루어졌어요. 인터넷도 PC통신도 없던 시대, 극장과 공원은 게이 남성들이 서로를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어요. 종묘공원, 남산공원, 바다극장, 극동극장 등도 당시 문서에 기록된 장소들이에요.
당시 한국 미디어에서 동성애는 대부분 선정적으로 다뤄졌어요. 1980년대 『선데이 서울』은 동성애를 사회 오염원이나 에이즈와 연결된 범죄로 묘사했어요. 이런 환경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동성애자로 규정하기를 거부했어요. 그럼에도 파고다극장 주변에는 사람들이 모였어요.
1990년대 들어 PC통신이 보급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시작했어요. 1993년 한국 최초의 동성애자 인권 단체 초동회 가 설립됐고, 1994년 남성 동성애자 단체 친구사이 와 여성 단체 끼리끼리 로 분리됐어요. 1997년에는 첫 동성애자 웹사이트 엑스존(Xzone) 이 문을 열었어요. 온라인 공간이 열리면서 공공장소 크루징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지기 시작했고, 파고다극장은 결국 문을 닫았어요.
디지털 전환 — 앱이 크루징을 바꾼 방식
2009년 3월 25일, Grindr 가 iOS 앱으로 출시됐어요. 창업자 조엘 심카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개발한 이 앱은 GPS를 이용해 주변의 게이 남성들을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크루징을 스마트폰 시대로 옮겨왔어요.

Grindr의 변화는 컸어요. 공공장소에서의 위험 없이 집에서 만남을 도모할 수 있게 됐고, 커밍아웃 초기 단계의 사람들에게 게이 커뮤니티로 들어오는 입구를 제공했어요. 현재 약 200개국에서 하루 300만 명 이상이 사용하는 앱이 됐어요.
그렇다고 디지털 전환이 크루징 문화를 소멸시킨 것은 아니에요. 공간이 물리적 공원에서 디지털 공간으로 이동했을 뿐, 즉각적인 만남을 추구하는 방식의 본질은 이어진다는 분석이 있어요. 앱은 크루징의 새로운 형태로 볼 수 있어요.
물론 비판도 있어요. 앱이 만남을 지나치게 소비화하고, 신체 이미지와 관련한 차별(연령, 체형, 인종)을 강화한다는 지적이에요. 2018년 Time Well Spent의 분석에 따르면, 하루 1시간 이상 Grindr를 사용하는 이용자의 77%가 앱 사용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다고 답했어요. 공원과 극장이 온라인으로 이사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나아진 건 아닌 셈이에요.
영화와 문학이 담은 크루징
크루징 문화는 예술 속에도 다양하게 기록됐어요.
《크루징(Cruising)》(1980) —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예요. 뉴욕 게이 S&M 지하 세계에서 연쇄 살인마를 추적하는 잠입 형사 이야기예요. 촬영 단계부터 게이 권리 단체의 시위를 받았어요. 게이 커뮤니티를 위험하고 일탈적인 존재로 묘사한다는 이유였어요. 알 파치노 자신도 나중에 이 영화가 "착취적"이었다고 인정했어요. 역사적으로는 주류 영화에서 게이 문화를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작품 중 하나이지만, 편견을 강화했다는 비판도 함께 남아 있어요.
반대 위치에 있는 영화가 《위켄드(Weekend)》(2011) 이에요. 앤드루 헤이 감독의 이 영국 로맨틱 드라마는 게이 바에서 시작된 원나잇이 하나의 주말로 확장되는 이야기예요. 판타지나 공포 없이 현대 게이 남성의 삶을 솔직하게 담아, 오슬로 게이·레즈비언 영화제 그랑프리를 수상했어요. 크루징이 단지 음지의 문화가 아니라 인간적 연결의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걸 조용히 보여주는 영화예요.
문학에서는 새뮤얼 딜레이니(Samuel R. Delany)의 《타임 스퀘어 레드, 타임 스퀘어 블루》(1999)가 뉴욕 42번가 포르노 극장에서의 크루징 경험을 통해 계층 간 교류와 도시 젠트리피케이션을 분석한 중요한 작품으로 꼽혀요. 학자 조지 체이시(George Chauncey)의 《게이 뉴욕(Gay New York)》(1994)은 20세기 초 뉴욕의 크루징 문화를 학문적으로 조명한 대표적 연구이고요.
크루징이 남긴 것
크루징 문화는 단순한 성적 행위의 역사가 아니에요. 그것이 남긴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어요.
커뮤니티 형성의 기반 — 범죄화와 억압 속에서도 크루징 공간은 게이 남성들이 서로를 만나고 정체성을 확인하는 장이었어요. 공원과 극장과 목욕탕의 네트워크가 없었다면, 1970년대 게이 해방 운동을 조직할 기반 자체가 없었을 거예요.
코드와 문화 언어 — 손수건 색깔, 시선 처리 방식, 공간 내 동선. 억압이 낳은 창조적 적응이었어요. 신원을 숨기면서도 서로를 알아보는 방식이었고, 이는 게이 커뮤니티 고유의 문화 언어가 됐어요.
퀴어의 공공 공간 권리 주장 — 학자들은 크루징을 "전통적인 급진적 퀴어 저항 행위"라고 불러요. 이성애 중심 사회가 규정한 섹슈얼리티의 장소와 방식을 거부하고, 공공 공간에 퀴어 존재를 새기는 행위였다는 거예요.
에이즈 위기 속 연대의 기억 — 목욕탕과 바들은 위기 속에서 의료 정보, 상호 지원, 안전한 성관계 교육의 허브가 됐어요. 위기는 공간을 빼앗는 동시에 더 강한 연대를 만들어냈어요.
마무리하며
크루징의 역사를 읽다 보면 한 가지가 선명하게 남아요. 어떤 시대에도, 어떤 조건에서도, 사람들은 서로를 찾아냈다는 거예요.
법이 막았을 때도, 경찰이 덫을 놓았을 때도, 에이즈가 공간을 닫았을 때도,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을 찾아냈어요. 공원에서 극장으로, 극장에서 온라인으로, 온라인에서 앱으로. 형태는 바뀌었지만 본질은 이어졌어요.
지금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켜는 앱, 별 고민 없이 들어가는 바가 — 수십 년의 저항과 생존 위에 있다는 것. 가끔 그 무게를 기억해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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