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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문화 안내서: 우리만의 언어와 역사

끼순이, 걸커, 일틱 — 게이 커뮤니티의 언어들. 억압 속에서 유머와 과장으로 살아남은 끼문화가 어디서 왔고, 지금 어디에 있는지 들여다봤어요.

끼문화 안내서: 우리만의 언어와 역사

끼가 뭔데?

게이 커뮤니티에 발을 들이면 꼭 한 번은 듣게 되는 말이 있어요. "쟤 완전 끼순이다." 혹은 "나는 끼가 없어서." 무리 안에서는 당연하게 쓰이는 단어인데, 처음 접하면 이게 뭔 말인지 감이 잘 안 잡히거든요.

끼는 과장된 여성스러움이에요. 화려한 손짓, 높아지는 목소리, 과장된 리액션, 캠피하고 유머러스한 에너지. 외모보다는 성격과 행동에 관한 말이고, 딱 보면 알 수 있는 어떤 것이에요.

이 글은 끼를 처음 접하는 사람도, 오래 써온 사람도 읽을 수 있도록 썼어요. 이 언어들이 어디서 왔는지, 우리 커뮤니티가 어떻게 키워왔는지를 같이 돌아보려고요.

핑크와 골드 글리터로 반짝이는 피부 클로즈업


우리만의 언어들

커뮤니티 안에는 끼와 관련된 단어들이 꽤 있어요. 판단 없이 하나씩 짚어볼게요.

끼순이

"끼스럽다"의 명사형이에요. 여성적 말투와 행동이 두드러진 게이를 가리키는데, 같은 단어가 여러 뉘앙스로 쓰여요. 친구 사이에서 애정을 담아 부를 때도 있고, 자기 자신을 자조적으로 표현할 때도 쓰이죠. 어떤 맥락인지는 상황을 봐야 알 수 있어요.

걸커

"걸어다니는 커밍아웃"의 줄임말. 끼순이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패션·말투·성격 등 여러 면에서 게이임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사람을 가리켜요. 의도해서 그러는 게 아닌 경우도 많아요. 그냥 자기 모습이 그대로 표현되는 거죠.

일틱

"일반틱"의 줄임말. 남성스러운 외모와 성격을 뜻해요. 커뮤니티 안에서 연애 상대를 얘기할 때 자주 나오는 단어예요.

기갈

끼의 과도한 형태예요. 히스테릭하고 공격적인 태도를 가리키는 말이라, 긍정적인 맥락으로는 잘 안 써요.


끼의 스펙트럼

모든 게이가 끼가 있는 건 아니에요. 없는 게이도 있고, 넘치는 게이도 있고, 상황마다 다른 게이도 있죠. 끼가 있다고 더 "게이다운" 것도 아니고, 없다고 덜한 것도 아니에요.

커뮤니티 안에서도 끼에 대한 시선은 다양해요. "끼 있다"는 걸 매력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연애 상대를 찾을 때는 일틱을 선호하는 사람도 많아요. 한쪽이 맞고 한쪽이 틀린 게 아니에요. 사람마다 다른 거죠.

이 언어들을 아는 게 재밌는 이유는, 거기 맞춰야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불러왔는지가 보이기 때문이에요.


이건 원래 있던 거야

끼가 갑자기 생긴 게 아니에요. 이 감수성에는 꽤 긴 역사가 있어요.

이반시티 시대: 끼순이 문화의 전성기

한국 온라인 게이 커뮤니티의 역사는 이반시티(IVANCITY) 없이 말할 수 없어요. 1999년 "화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이후 이반시티로 이름을 바꾼 이 포털은, 2011년 기준 회원 수 22만 명에 하루 순 방문자가 4만–5만 명에 달했어요.

이 공간에서 끼순이 문화가 꽃을 피웠어요. 익명게시판을 중심으로 서로를 "언니"라 부르는 문화가 자리 잡았고, 낚시글·잉여글·개드립이 난무하는 특유의 분위기가 생겼어요. 지금 봐도 낯설지 않은 그 에너지, 2000년대 초중반 이반시티가 절정이었어요.

그 전에는 어땠냐고요? 1980–90년대에는 "동성애가 무엇인지조차 생소했던" 시대였어요. 게이들은 극장이나 공중화장실 같은 음지에서 교류하는 경우가 많았고, 끼순이 문화가 집단적으로 가시화된 건 온라인 커뮤니티가 생기면서부터예요. 이반시티가 그 출구였던 거죠.

지금 이반시티는 좀 다른 상황이에요. 젊은 게이들이 트위터(X)·인스타그램·데이팅 앱으로 이동하면서, 중장년층이 대부분인 "중년시티"가 됐어요. 끼의 무대가 온라인 한 군데에서 여러 곳으로 분산됐다고 볼 수도 있겠죠.

서구의 뿌리: 캠프와 볼룸

서구의 퀴어 문화에는 이 감수성을 설명하는 말이 따로 있어요. 수전 손택은 1964년 에세이 「Notes on "Camp"」에서 캠프의 본질을 이렇게 정의했어요. "인공적인 것에 대한 사랑, 과장에 대한 사랑." 진지함보다 유희를, 내용보다 스타일을 택하는 감수성이에요.

그는 LGBTQ 커뮤니티가 이 미학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전유해왔다고 인정했어요. "도덕적 분노를 무력화하는 방법으로." 억압 속에서 과장과 유머가 저항의 언어가 됐다는 거죠.

비슷한 맥락에서 1960–70년대 뉴욕 할렘의 볼룸(Ball culture) 씬이 있어요. 흑인과 라틴계 LGBTQ 커뮤니티가 만든 지하 공간이었고, 보깅(Voguing)은 그 안에서 1980년대 후반에 구체화됐어요. 1990년 마돈나의 "Vogue"가 이 문화를 전 세계에 알렸지만, 원조 커뮤니티의 맥락은 빠진 채였다는 논란도 함께 따라왔죠.

한국 드래그 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한국 드래그 문화 가이드에서 따로 다뤘어요.

스마트폰으로 콘텐츠를 소비하는 모습

홍석천에서 김똘똘까지

방송에서는 2000년이 하나의 기준점이에요.

그해 9월 26일, 홍석천이 한국 연예인 최초로 공개 커밍아웃했어요. 그 직후 지상파에서 전면 퇴출됐고, 약 7년간 지상파 복귀가 불가했죠. "게이 같다"는 말이 욕으로 쓰이던 시대였어요. 홍석천은 이태원에 식당을 열고 외식업으로 살아남았어요.

2007년경 케이블 방송에 복귀했고, 2010년 전후로 지상파 예능에도 얼굴을 비쳤어요. "유쾌한 게이" 캐릭터로 천천히 자리를 잡아갔죠.

2024년에는 김똘똘 이 MBC 라디오스타에 나왔어요. 해당 클립이 4일 만에 56만 뷰를 기록했고, 한국일보는 그를 "24년 만에 나타난 게이 라이징스타"로 소개했어요. 홍석천과 다른 점이 있다면, 김똘똘은 커밍아웃보다 예능 캐릭터로 먼저 인지됐다 는 거예요. 성소수자임을 예능 소재로 풀지 않으면서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됐죠.

홍석천에서 김똘똘까지 25년. 끼가 숨어 있던 시간과,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온 시간이에요.


요즘 끼가 대세라며?

파란 레이저 조명 아래 군중 실루엣

어느 순간부터 예능에서 "끼 부린다"는 말이 칭찬으로 들리기 시작했어요. BL 드라마가 OTT 알고리즘에 올라오고, 캠피한 콘텐츠들이 숏폼에서 바이럴되는 일도 늘었죠.

솔직히 뿌듯한 부분이 있어요. 홍석천이 방송에서 퇴출됐던 2000년과 지금은 분명히 달라요. 끼가 트렌드가 됐다는 건, 적어도 우리 문화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뜻이니까요.

한 가지만 슬쩍 짚자면, 끼가 콘텐츠로 소비되는 것과 끼 있는 사람이 실제로 환영받는 건 다른 이야기예요. 끼를 즐기는 것과 끼 있는 사람을 존중하는 건 같은 게 아닐 수 있으니까요. 뭐, 그래도 원래 우리 거였으니까. 이 여유가 지금은 제일 맞는 것 같아요.


끼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고

끼를 즐기든 안 즐기든 자유예요. 굳이 끼를 내야 하는 것도 아니고, 없다고 커뮤니티에서 이방인이 되는 것도 아니에요.

다만 이 감수성이 어디서 왔는지 아는 건 나름 의미 있어요. 극장 음지에서 시작해, 이반시티 익명게시판에서 "언니"라 불리며 꽃피고, 지금은 앱과 SNS 사이 어딘가에 살아있는 문화예요. 웃기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게 생존의 방식이었던 시간들이 있었으니까요.

끼순이도, 일틱도, 뭔지 아직 모르겠는 사람도 다 여기 있어요. 어서 와요, 이게 우리 문화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