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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 게이 공간의 역사

1.개요

종로 게이 공간의 역사는 서울 종로3가역 북쪽 낙원동 일대에 게이 남성이 모이는 장소가 생기고 바뀌어 온 과정입니다.[1] 게이 남성들이 이곳에 모이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입니다.[2] 이태원의 첫 게이클럽이 1995년에 문을 연 것과 비교하면 20년 가까이 앞섭니다.[3]

2.위치

중심은 종로3가역 북쪽, 낙원상가와 탑골공원 사이의 낙원동 일대입니다. 서쪽으로 인사동, 동쪽으로 종묘가 있습니다.[1] 실제로는 종로3가역을 둘러싼 낙원동, 돈의동, 묘동, 익선동에 게이 업소가 흩어져 있습니다.[4] 게이바가 모인 골목 옆으로 돈화문로의 포장마차 거리가 이어집니다.[5]

계동 쪽 높은 곳에서 남산을 바라보고 내려다본 익선동, 낙원동, 인사동 일대의 낮은 한옥 지붕과 건물들
계동에서 남산 쪽으로 내려다본 익선동·낙원동·인사동 일대, 1982년 6월 25일.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공공누리 제1유형

3.역사

3.1.1970년대 이전

서울의 게이 남성들이 일찍부터 모인 곳은 극장이었습니다. 1950년대부터 게이들이 모인 동네는 대부분 극장을 낀 번화가였고,[1] 극장 주변에 게이가 드나드는 술집이 생겼습니다. 시기마다 중심이 된 극장은 이렇습니다.[2]

시기극장
1950년대명동 동명극장, 뉴만극장
1960년대신당동 광무극장
1970년대종로3가 파고다극장

종로보다 먼저 이름을 알린 곳은 신당동입니다. 신당동에는 1960년대부터 게이들이 꾸준히 모였습니다.[1]

종로3가 뒷골목에는 종삼이라고 불린 성매매 집결지가 있었습니다. 서울시는 1968년 9월 27일 정화사업을 시작했고, 10월 5일 새벽 철거로 작전을 끝냈습니다.[6] 이날 마지막 72명이 보호소로 옮겨지면서 250여 가구, 1,400여 명이 살던 집결지가 비었습니다.[7]

이 철거는 비워진 자리에 게이 업소가 들어설 수 있게 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힙니다. 철거 뒤에도 이 일대에서는 겸업 성매매가 이어졌고, 그 틈에 게이바가 하나둘 생겼습니다.[2] 게이바가 본격적으로 늘어난 것은 1970년대 후반입니다.[1]

3.2.1970년대

파고다극장은 탑골공원 동쪽 문 바로 앞에 있던 극장입니다. 1960년대 초에 세워져 1966년에는 서울의 3대 극장으로 꼽혔다는 글이 있고,[2] 개관을 1970년대 중반으로 적은 연구도 있습니다.[1] 정확한 개관 연도는 자료마다 다릅니다.

1960년대 말부터 이 극장은 두 편을 이어 트는 동시상영관이 됐습니다. 표 한 장으로 하루 종일 머물 수 있었고, 1970년대에는 게이 남성들의 대표적인 만남 장소가 됐습니다. 게이들 사이에서는 P극장이라는 이름으로 통했습니다.[2]

극장을 중심으로 게이바가 생겼습니다. 1974년 창덕궁 앞에 문을 연 「심」은 종로 지역의 첫 게이바로 기록돼 있고, 1978년 「갈등」, 1979년 「갈」이 뒤를 이었습니다.[2]

3.3.1980년대

1982년 1월 야간통행금지가 풀린 뒤 게이바는 크게 늘어, 1980년대 이 일대에는 50~60곳이 영업했습니다.[2]

1980년대에는 탑골공원 일대도 만남 장소였습니다. 밤에 탑골공원 주변을 서성이며 상대를 찾는 사람을 탑돌이라고 불렀습니다.[1]

높은 건물에서 내려다본 파고다공원. 나무로 덮인 공원 가운데 원각사지 십층석탑이 보이고, 공원 서쪽과 남쪽으로 큰길이 지난다
위에서 내려다본 파고다공원(지금의 탑골공원)과 그 둘레, 1985년 5월 21일. 사진: 서울역사아카이브, 공공누리 제1유형

단속도 있었습니다. 1980년대 종로3가의 한 게이바 주인은 "무슨 호모 바냐" 하는 소리를 들으며 종로경찰서에 "밥먹듯이" 드나들어야 했다고 회고했습니다.[2]

3.4.1990년대

1990년 1월 1일부터 유흥업소의 심야영업이 다시 제한됐습니다. 관광특구는 새벽 2시, 그 밖의 지역은 자정까지만 영업할 수 있었고, 게이 업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한은 잘 지켜지지 않았고, 자정 넘어 몰래 영업하는 게이바가 많았습니다. 광고에 "매일밤 11:30-12:00 봉고대기"라고 적어 자정 이후에도 문을 연다는 사실을 알린 가게도 있었습니다.[2]

1993~1994년에 신당동의 성동극장이 문을 닫자 그곳의 게이바는 줄거나 업종을 바꿨고, 그곳에 모이던 사람들이 낙원동으로 옮겨 오기 시작했습니다.[1]

같은 시기 PC통신과 인터넷에서 게이 모임이 빠르게 늘었습니다. 1996년 이후 온라인 모임의 대규모 정기모임은 주로 이태원에서 열렸습니다.[1]

심야영업 제한은 두 번에 나눠 풀렸습니다. 1998년 9월 15일 식당과 다방 같은 일반·휴게음식점이 먼저 풀렸고,[8] 단란주점과 유흥주점은 1999년 3월 1일부터 영업시간이 자유로워졌습니다.[9]

3.5.2000년대

파고다극장은 2000년대 초 문을 닫았습니다. 연도는 자료에 따라 2001년,[2] 2002년[1]으로 적힙니다. 문을 닫기 전까지 극장 주변에는 게이바를 비롯한 게이 업소가 60~80곳 있었습니다.[1]

만남의 정보를 온라인에서 얻게 되면서 만남 장소로서 극장의 몫은 줄었습니다. 그런데 낙원동 골목은 오히려 더 붐볐습니다. 2000년대 들어 이태원의 업소가 줄어드는 사이 업소는 낙원동으로 몰렸고, 2005년 무렵 낙원동 일대의 게이 업소는 게이바와 DVD방을 합쳐 약 85곳이었습니다.[1]

돈화문로 포장마차 거리는 2009년 서울시가 종로 대로변의 노점을 옮긴 뒤 생겼습니다. 종로3가역 5번 출구에서 3번 출구까지 약 200m입니다.[5] 그해 11월 서울시는 대로변 노점 100여 개를 낙원동에 만드는 거리로 연말까지 옮긴다고 밝혔습니다.[10]

4.이용자층

1996년 이후 온라인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이태원으로, 윗세대는 종로로 모이는 흐름이 생겼습니다.[1]

포장마차 거리는 게이들이 모이는 자리로 알려졌습니다. 2016년 5월 자정 무렵 종로3가역 6번 출구 앞 포장마차는 20~30대 남성 손님으로 가득했습니다.[11] 2019년 조사에서도 자정이 넘으면 포장마차 손님 대부분이 게이 남성으로 바뀌었습니다.[4]

바로 옆 익선동이 뜬 뒤로는 게이가 아닌 손님도 많이 찾는 곳이 됐습니다. 이성애자 손님이 늘면서 전처럼 편하게 머물기 어려워졌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12] 지금은 포장마차 대부분을 이성애자 손님이 채우고, 게이 손님은 일부 가게만 찾습니다.[4]

한옥 처마가 늘어선 익선동의 좁은 골목. 가게 간판과 현수막이 걸려 있고 뒤로 호텔 건물이 보인다
익선동 한옥 골목, 2020년 10월 1일. 사진: S h y numis, Wikimedia Commons, CC BY-SA 4.0

5.오해

종로 게이 역사로 흔히 옮겨지는 이야기 가운데 기록과 어긋나거나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 일제강점기에 게이들이 모이는 술집과 양복점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 1950년대 게이들이 명동의 양장점을 중심으로 모였다는 이야기가 있지만, 기록에 남은 곳은 극장과 다방입니다.[2]
  • 1960년대 을지로 인쇄골목에서 청계천 변을 거쳐 종로로 옮겨 왔다는 경로가 있습니다. 을지로 인쇄소 골목에 게이바 「아담」이 있었다는 기록은 있지만,[13] 청계천 변을 거쳤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 「심」이 한국 최초의 게이바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1960년대 을지로의 「아담」을 적은 1998년 잡지 기사가 있어, 「심」은 종로 지역의 첫 게이바로 보는 편이 정확합니다.[13]
  • 파고다극장 근처에 있었다는 특정 게이바의 이름, 극장을 잘못 찾아간 사람들의 일화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 온라인 게이 모임의 첫 정기모임에 1천 명이 모였다는 이야기는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 심야영업 제한이 1998년 8월에 풀렸다는 서술이 있습니다. 1998년 6월 정부는 8월 1일부터 전면 해제한다고 발표했지만,[14] 실제로는 음식점이 9월 15일, 유흥업소가 이듬해 3월 1일에 풀렸습니다.[8]
  • 이태원이 뜬 뒤 종로가 쇠퇴했다는 서술이 있지만, 기록은 2000년대 초 낙원동이 오히려 커졌다고 봅니다.[1]

6.관련 문서

각주

  1. 이서진, 「게이 남성의 장소 형성: 종로구 낙원동을 사례로」, 『지리학논총』 49호, 2007. ↩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2. 김대현, 「종로3가 게이 게토와 게이커뮤니티의 위치」, 『친구사이 소식지』 99호, 2018년 9월 30일. 『주간경향』, 『BUDDY』, 『보릿자루』, 경향신문 등의 기사를 인용한 글입니다. ↩ ↩2 ↩3 ↩4 ↩5 ↩6 ↩7 ↩8 ↩9 ↩10 ↩11

  3. 일요시사, 「[현장르포] 게이들의 '놀이터' 이태원을 가다」, 2012년 1월 27일. ↩

  4. 이창환, 「지역 상권 활성화에 따른 종로3가 게이 공간의 변화와 대응」, 『한국지역지리학회지』 26권 4호, 2020. ↩ ↩2 ↩3

  5. 한국경제, 「이대로 보내기 아쉬운 초여름, 청춘들을 위한 종로3가 포차거리[MZ 공간 트렌드]」, 2023년 6월 25일. ↩ ↩2

  6. 아시아경제, 「[그 섬, 파고다] 4-② 윤락녀 소탕 '나비작전'후 쪽방이 채웠다」, 2013년 11월 7일. ↩

  7. 서울신문, 「[DB를 열다] 1968년 나비작전으로 철거된 종삼 골목」, 2013년 2월 25일. ↩

  8. 한국일보, 「심야영업 8년8개월만에 재개/호프집 등 손님들 '북적'」, 1998년 9월 15일. ↩ ↩2

  9. 한국일보, 「[3월부터 달라지는 것들] 노래방등 심야영업 풀린다」, 1999년 2월 27일. ↩

  10. 이투데이, 「포장마차 난립한 '종로3가' 관광특화거리로 거듭난다」, 2009년 11월 29일. ↩

  11. 헤럴드경제, 「[오늘 동성애 혐오 반대의 날 ①] "홍대 앞이나 종로 게이거리나 다 사람사는 곳이죠"」, 2016년 5월 17일. ↩

  12. 아시아경제, 「[르포] "이렇게 밀려나네요"…종로 낙원동, 모습 감추는 '성소수자'」, 2019년 2월 12일. ↩

  13. 이송희일, 「박꽃 흐드러진 white saturday night: 게이바의 역사」, 『BUDDY』 6호, 1998. 김대현, 「종로3가 게이 게토와 게이커뮤니티의 위치」에서 재인용. ↩ ↩2

  14. 매일신문, 「식당.술집 심야영업 8월부터 전면허용」, 1998년 6월 6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