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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개와 정모

미리 약속하지 않고 바로 만나는 번개와 날을 정해 모이는 정모는 PC통신에서 나온 말입니다. 한국 게이들이 이 두 방식으로 오프라인에서 어떻게 만나 왔는지, 모임에서 통하는 관습은 무엇인지 담았습니다.

분류
번개|정모|소모임

번개와 정모 한눈에

말이 생긴 곳
1990년대 PC통신 동호회
번개의 두 뜻
즉석 모임, 일회성 성적 만남
정모
정기 모임의 줄임말

두 말의 뜻

번개는 온라인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 예정 없이 바로 만나는 일입니다. 사전은 번개 모임을 "주로 인터넷 채팅으로 만나던 사람들이 예정에 없이 즉석에서 실제로 만나는 모임"으로 풉니다. 정모정기 모임을 줄인 말로, 날짜를 정해 두고 모이는 자리입니다.

두 말은 1990년대 PC통신 동호회에서 퍼졌습니다. 1996년 신문 기사는 번개를 대화방이나 게시판에서 시간과 장소를 즉석에서 정해 열 명에서 스무 명, 혹은 두세 명이 모였다 헤어지는 일로 소개했습니다. 그해 하이텔에 등록된 동호회와 소모임만 300여 개였고, 볼링장번개, 술번개, 둘이 만나는 번개팅처럼 목적에 따라 이름이 갈렸습니다.

게이 사이에서 번개는 뜻이 하나 더 붙었습니다. 처음 보는 사람과 하룻밤 섹스를 목적으로 만나는 일입니다. 연구 논문도 번개를 "일회적인 성관계를 뜻하는 게이 하위문화의 은어"로 적습니다. 그렇다고 원래 뜻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게이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지금도 술 마실 사람을 모으는 술번개 게시판이 따로 있습니다. 은어로서의 뜻은 게이 은어 「만남과 장소」 절에 정리돼 있습니다.

PC통신 시절의 모임

PC통신 게이 모임은 섹스 상대를 찾는 곳이라기보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작은 공동체에 가까웠습니다. 게시판이 글로만 이뤄져 있어 상대를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연구는 이 시기에도 성적인 만남은 여전히 종로의 극장, 사우나, 술집에서 이뤄졌다고 봅니다 (종로 게이 공간의 역사).

대신 모임은 크게 열렸습니다. 당시 활동한 한 게이바 운영자는 통신사 모임 하나가 모이면 150명, 하이텔·천리안·나우누리 세 곳 모임이 함께 모이면 400명에 이를 때도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버스를 빌려 부산과 광주로 가거나 산행을 핑계로 지방 회원들과 어울렸고, 이태원의 한 소주집을 거점 삼아 몰려가기도 했습니다. 온라인 공간 자체의 변천은 한국 게이 온라인 커뮤니티의 변천에 있습니다.

1:1 번개: 게시판에서 앱으로

2000년대 초고속인터넷과 함께 사진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면서 1:1 번개의 무대가 온라인으로 옮겨 왔습니다. 게이 포털의 익명게시판에서 번개 상대를 구했고, 포털 카페의 회원 사진 게시판은 연애 상대를 찾는 자리가 됐습니다. 방식은 번거로웠습니다. 한 사람이 사진과 키, 몸무게, 나이를 올리면 관심 있는 사람들이 비밀 댓글로 메신저 아이디를 남기고, 글쓴이가 그 아이디를 하나씩 등록해 말을 거는 식이었습니다.

위치 기반 데이팅 앱은 이 과정을 줄였습니다. 앱은 가까운 사람을 격자 모양 프로필로 늘어놓고 거리를 미터와 킬로미터로 보여 줍니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고 답을 기다리던 과정이, 지금 근처에 있는 사람에게 바로 말을 거는 일로 바뀌었습니다.

대화를 여는 말에도 관습이 생겼습니다. 인터뷰에 응한 한 이용자는 인사하자마자 "어떤 분 찾으세요"라고 묻고, 번개를 원하면 오픈이요번개만요라고 답하는 흐름을 설명합니다. 대놓고 번개를 제안했다가 거절당하는 민망함을 피하려고 돌려 말하는 방식입니다. 한편 한 번에 두세 명에서 열 명과 동시에 연락하다 보니 답이 조금만 늦어도 관계가 쉽게 끊긴다는 불만도 나옵니다.

소모임과 정모

1:1 번개와 따로, 여럿이 꾸준히 만나는 소모임도 이어져 왔습니다. 지금 게이 커뮤니티 사이트의 모임 게시판을 보면 모임의 형태는 카카오톡 단체방, 밴드, 포털 카페, 동호회로 나뉩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모이는지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기준
운동배드민턴, 테니스, 족구, 스키와 스노보드, 스쿠버다이빙
취미댄스, 게임, 반려견, 독서
지역서울 동쪽, 충청, 부산, 대구·경상권
나이88~83년생, 2030처럼 출생 연도나 연령대를 제목에 적음
체형통통한 사람과 평균 체형(통스), 베어, 근육
직업언론인, 공기업·공무원·전문직

단체방이나 밴드로 모이는 모임에서 정모는 온라인 관계를 오프라인으로 잇는 자리입니다. "다른 지역은 정모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만"이라는 조건을 붙여 회원을 받는 단체방도 있습니다. 2014년 한 게이 카페는 그해 모임에 나오면 회원 등급을 올려 준다고 공지했습니다. 오프라인에 얼굴을 비추는 일을 회원 자격과 묶은 셈입니다.

정모 뒤에는 밥이나 술자리가 이어지기도 합니다. 20대부터 40대까지 섞인 한 독서 모임 참가자는 모임을 마치고 함께 밥을 먹으며 나눈 일상 이야기가 즐거웠다고 적었습니다.

친목과 번개의 구분

모임 안에서는 친목과 번개를 나누는 선이 자주 등장합니다. 모임 소개에 순수친목이나 식차별 없는이라는 말을 붙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식차별은 외모 취향(식)으로 사람을 가려 대하는 일을 뜻합니다. 술·담배를 하지 않는 사람만 모이는 밴드처럼 모임의 성격을 조건으로 적어 두기도 합니다.

사이트 운영자도 이 선을 긋습니다. 한 게이 커뮤니티 사이트는 2025년 공지에서 자신들을 "친목을 다지고 서로 교류하며 긍정적인 인연을 만들어가는 공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성관계를 목적으로 한 만남 제안 글은 삭제하고, 연락처는 만남 전용 게시판에만 올리게 했습니다.

모임과 번개가 겹칠 때 생기는 예의도 있습니다. 한 연구는 어느 모임에서 만났거나 한 번 섹스로 얼굴을 안 사람을 다른 자리에서 다시 만나면 서로 모른 척하는 것이 예의처럼 여겨진다고 짚습니다. 아는 척을 해도 되는지는 술자리에서 상대의 눈치를 보며 정한다는 증언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이름과 얼굴을 다루는 법

게이 공간에서는 본명 대신 다른 이름을 쓰는 관습이 오래됐습니다. 온라인 게시판은 처음부터 닉네임을 바탕으로 돌아갔고, 게이바에서도 손님들이 바에서만 쓰는 가명, 이른바 바 네임을 쓰곤 했습니다. 반면 나이는 감추지 않는 편입니다. 모임 제목에 출생 연도 범위를 적을 만큼 나이가 모임을 나누는 기준이 되고, 모임 안에서는 나이 많은 사람을 형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흔합니다.

사진은 가장 조심스럽게 다루는 정보입니다. 앱 이용자들은 사진 교환을 제안해도 서로 먼저 보내지 않으려 한다고 말합니다. 프로필에 NPNC(사진 없으면 대화하지 않음)를 적어 두기도 합니다. 남의 사진을 가져다 쓰는 도용이 오래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모임 쪽에서는 반대로 얼굴 공개를 가입 조건으로 내건 밴드도 있습니다.

이런 조심성의 바탕에는 아웃팅, 곧 본인이 원하지 않는데 성적 지향이 드러나는 일에 대한 걱정이 있습니다. 한 인터뷰 참여자의 표현대로 사람이 서로 겹치는 "좁은 바닥"이기 때문입니다.

게이바와 모임

모임은 게이바를 정모 장소로 쓰기도 합니다. 종로3가 근처에서 게이바를 운영한 한 사람은 자기 바에서 댄스 모임이 격주 일요일 오후 3시부터 7시까지 춤을 추고, 다른 모임 몇 곳이 토요일 저녁에 대규모 정모를 연다고 말했습니다. 넓은 업장을 얻을 때부터 여러 동호회의 정모 장소로 쓰이기를 바랐다고도 했습니다.

모임이 업소를 낳기도 합니다. 한 연구에 실린 게이바 운영자는 게이 살사 모임에 취미로 들어갔다가 2011년 바를 열었고, 여럿이 춤출 수 있게 넓은 공간을 얻어 연습 기자재를 들여놓았습니다. 연구는 게이 취미 모임과 게이 업소 사이의 경계가 이렇게 흐려지고 겹쳐 왔다고 봅니다. 게이바 문화는 게이바, 섹스를 목적으로 가는 업소는 찜방 문서에 있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

번개와 정모에 대해 흔히 퍼진 이야기 가운데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거나 사실과 다른 것들입니다.

  • 게이 사이에서 번개는 언제나 섹스를 뜻한다는 이야기. 술번개처럼 여럿이 모이는 자리를 가리키는 쓰임도 남아 있습니다
  • 게이들이 왼쪽 손목에 노란 고무줄을 차서 서로를 알아봤다는 이야기. 온라인 모임 게시판에 그런 제안이 올라왔었다는 한 사람의 회고만 있습니다
  • 온라인 게이 모임의 첫 정모에 1천 명이 모였다는 이야기
  • 데이팅 앱이 나온 뒤 오프라인 모임이 사라졌다는 이야기. 지역, 운동, 나이대별 모임은 지금도 정모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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