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원 게이 공간의 역사
미군기지 옆 유흥가였던 이태원에 1990년대 중반 게이바가 들어서고, 소방서 뒷골목 언덕이 게이힐이 되기까지의 과정입니다. 앉아서 마시는 종로와 달리 춤추는 클럽이 이곳의 중심이었습니다.
이태원 게이 공간의 역사 한눈에
- 중심
- 용산구 우사단로12길 일대
- 자리 잡은 때
- 1990년대 중반
- 성격
- 클럽과 드랙쇼 중심
어디를 말하나
이태원역에서 이태원소방서 쪽으로 가다 뒤편 언덕으로 오르는 골목, 우사단로12길 일대입니다. 흔히 게이힐이나 호모힐이라고 부릅니다. 게이클럽과 게이바가 모인 언덕길이라는 뜻의 속칭입니다.
바로 옆 우사단로14길은 후커힐, 그 너머 우사단로10길은 이슬람사원이 있는 이슬람 언덕입니다. 게이힐과 후커힐은 10m쯤 떨어진 나란한 골목이라, 두 길의 역사는 따로 떼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게이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90년대 중반입니다. 1970년대에 자리 잡은 종로보다 한 세대 늦습니다.
미군기지와 이태원
이태원의 밤거리는 미군기지에서 시작됐습니다. 1945년 9월 미군 제24사단이 용산의 일본군 기지를 넘겨받았고, 한국전쟁 뒤 용산기지 옆 이태원에 기지촌이 생겼습니다. 이태원은 미군을 상대하는 유흥업소가 모인 중심지가 됐고, 후커힐은 그 가운데 성매매가 이뤄지던 거리였습니다. 소방서 골목에는 외국인만 드나들 수 있는 클럽들이 들어섰습니다.
이 시기의 기지촌에는 여장을 한 남성도 일했습니다. 1970년대 이태원에서 쓰인 게이라는 말은
지금의 게이 남성보다는 여장을 하고 남성과 관계하는 사람을 가리켰을 가능성이 크다고 연구는
봅니다.
1990년대 들어 사정이 바뀌었습니다. 한국인의 소비력이 커지면서 미군이 상권에 미치는 힘이 줄었고, 후커힐의 업소들도 한국 남성을 주된 손님으로 받기 시작했습니다. 1997년 9월 이태원은 관광특구로 지정됐습니다.
1990년대 중반, 첫 게이바
이태원의 첫 게이바는 1995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첫 가게로 터널을 꼽는 기사와 그해 2월 무렵
연 파슈를 꼽는 기사가 있습니다. 1996년에는 춤추는 클럽 형태의 스파르타쿠스가 생겼습니다.
그전까지 서울의 게이 업소는 종로와 신당동에 모여 있었고, 대부분 단란주점 형식이었습니다.
스파르타쿠스에 20대 초반 손님이 몰리면서 이태원은 새 중심지로 떠올랐습니다.
1996년 11월 신문은 서울의 게이바를 70여 곳으로 헤아리며 이태원과 낙원동 일대에 몰려 있다고 적었습니다. 해밀턴호텔 맞은편 골목 지하의 한 클럽은 60평 남짓한 홀 가운데 바가 있고 입구 옆에 춤출 무대가 있었습니다. 소방서 뒤편 골목 지하의 게이바에는 외국인 손님도 자주 드나들었습니다.
게이힐 골목의 첫 게이바는 트랜스입니다. 월세가 싸서 이 가게를 중심으로 주변에 바와 클럽이 하나둘 생겼습니다. 트랜스는 원래 평범한 게이바였는데, 직원들이 재미로 여장을 하고 작은 무대에서 립싱크 쇼를 하던 것이 반응을 얻어 정기 드랙쇼가 됐습니다. 드랙쇼는 남성이 과장된 여성의 모습으로 꾸미고 노래나 춤을 선보이는 공연입니다.
같은 시기 명동, 신당동, 종로에 흩어져 있던 게이바도 이태원으로 옮겨 오기 시작했습니다. 이태원에 게이가 모인 까닭을 두고 연구는 외래문화를 받아들이던 동네의 성격, 1990년대 이후 소방서 골목에 몰린 업소, 온라인 모임을 통해 이곳을 찾은 젊은 세대를 꼽습니다. 온라인 모임의 변천은 한국 게이 온라인 커뮤니티의 변천에 정리돼 있습니다.
종로와 다른 손님
두 동네는 처음부터 쓰임이 달랐습니다. 1996년 이태원의 한 게이바 주인은 "동성애자들은 주로 낙원동에서 1차를 한 뒤 이태원의 게이바에 들렀다 3차로 여관을 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습니다.
종로의 게이 업소는 앉아서 대화하는 바가 중심이었습니다. 일어서서 춤추는 클럽을 즐기려면 당시에는 이태원밖에 없었습니다. 2012년 기사도 이태원 게이바는 주로 클럽 형태이고 종로보다 개방적이며, 손님이 20대와 30대에 몰려 있다고 적었습니다.
골목의 생김새도 차이를 만들었습니다. 종로는 서울 한복판이라 게이바가 외진 골목에 있어도 다른
행인의 눈에 띄기 쉬웠습니다. 게이힐은 언덕 위까지 업소만 있어 그 길을 오르는 사람은 대부분
업소를 찾는 손님입니다. 그래서 가게 안뿐 아니라 골목에서도 스스로를 덜 숨길 수 있었습니다. 연구는
이태원의 게이 공간을 개방성과 드러내기로, 낙원동을 폐쇄적인 공간으로 구분합니다.
손님층은 세대로 갈렸습니다. 클럽을 찾는 젊은 게이들과 종로의 바에 익숙한 윗세대 사이에 거리가 생겼습니다. 다만 2000년 3월 업소 정보지가 헤아린 이태원 업소도 가라오케와 카페가 가장 많았고 클럽은 그다음이었습니다. 이태원이 처음부터 클럽만의 동네였던 것은 아닙니다.
2000년대, 클럽과 이웃 골목
2000년대 초에는 게이클럽이 서울 클럽 문화의 앞자리에 있었습니다. 강남과 홍대에 클럽이 드물던
때라, 이태원의 게이클럽 G-Spot에는 이성애자 손님과 연예인도 드나들었습니다. 2001년 3월
6호선 이태원역이 문을 열면서 오가는 길도 편해졌습니다. 2006년 무렵 G-Spot이 다른 이름으로
바뀌고 해밀턴호텔 지하에 새 클럽이 생기는 등, 클럽은 생겼다 사라지기를 거듭했습니다.
게이힐의 업소들은 이 무렵부터 옆 골목으로 자리를 넓혔습니다. 후커힐에 있던 바는 지금 트랜스젠더가 일하는 업소 위주로 남았고, 이성애자 손님을 받는 곳은 세 곳뿐이라고 2024년 연구는 적었습니다. 1990년대에 이미 이 일대에는 트랜스젠더 클럽이 성업했고, 게이바와 트랜스젠더 바가 두 골목에 섞여 자리 잡았습니다.
2012년 무렵 이태원의 게이 업소는 30여 곳이었습니다. 이 시기를 지나온 한 손님은 "예전에는 상대를 찾거나 애인을 만나러 바에 갔지만, 지금은 편하게 어울리거나 클럽에 간다"고 말했습니다.
2010년대 이후, 파티와 케이팝
2010년대에는 클럽 밖의 파티가 커졌습니다. 서킷 파티는 게이들이 대규모로 모여 춤추는 파티 행사입니다. 한국의 첫 게이 서킷 파티는 2007년 청담동과 남산에서 열렸지만 적자로 끝났습니다. 2011년 8월에는 이태원의 한 호텔 지하 클럽에서 파티 브랜드 VELOCITY의 첫 회가 열렸고, 2013년까지 여섯 차례 이어졌습니다. 2012년 문을 연 클럽은 구석에 있던 DJ 부스를 무대 앞으로 끌어냈습니다.
케이팝이 게이힐의 음악이 된 것도 이 무렵입니다. 2000년대 후반 문을 연 클럽 펄스는 케이팝만
트는 끼타임을 만들었고, 이 시간이 클럽 인기의 중심이 됐습니다. 손님들이 모임을 꾸려 안무를
배우고 춤추는 영상을 SNS에 올리는 일이 흔해졌습니다. 2025년 연구는 게이클럽에서 케이팝 안무를
함께 추는 놀이가 손님들을 하나로 묶는 동시에, 외국인이 많은 이태원에서 인종에 따른 경계를
만들기도 한다고 분석했습니다.
2020년대에는 새 클럽이 여럿 문을 열어 손님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입구에서 손님을 가려 받는
직원을 가드라고 부릅니다. 2024년에는 새 업소가 계속 생기는 가운데 태국, 중국, 일본 등지에서 온 관광객이 게이힐을 찾았습니다.
확인되지 않은 이야기
이태원 게이 역사로 흔히 옮겨지는 이야기 가운데 기록으로 확인되지 않거나 자료끼리 어긋나는 것들입니다.
- 1980년대부터 게이힐에 게이클럽이 생겼다는 서술. 이태원 게이바의 기록은 1995년부터 나옵니다
- 이태원 최초의 게이바가 어디인지.
터널과파슈를 꼽는 기사가 엇갈립니다 - 트랜스의 개업 연도. 자료마다 1995년, 1996년, 1997년으로 다릅니다. 1996년 11월 기사에 이미 이름이 나오므로 1997년은 맞지 않습니다
- 트랜스가 한국 최초의 드랙쇼 클럽이라는 이야기. 같은 무렵 이태원의 다른 업소에서도 단체 관광객을 상대로 드랙쇼를 했습니다
- 기지촌이 생긴 직후인 1960년대부터 게이들이 이태원에 모였다는 이야기. 연구자의 추정이고 기록은 없습니다
- 2001년 9·11 테러 뒤 미군이 게이힐과 후커힐 출입을 금지했다는 이야기. 한 연구에만 나오고 미군 쪽 자료로는 확인되지 않습니다